부산 사람도 모르는 진짜 부산의 이야기를 전하다 / 여행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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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앞에 가면 군복바지에 군화를 신은 ‘조 교’가 있다. 이들은 부산 사람도 모르는 진짜 부산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부산역 앞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조교의 정체는 <부 산여행특공대> 게릴라버스투어를 진행하는 여행조교 손민수, 일명 손 반장이다. 그는 기존에 잘 알려진 해운대나 광안리 같은 명소보다는 부산의 숨은 진면목을 알리고자 부산의 옛 사진과, 옛 노래 그리고 부 산 사람들의 이야기로 투어를 진행한다. 그들이 안내하는 부산은 해운대, 광안리, 태종대로 대표되는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진짜 부산 사람들의 역사와 이야기, 감동이 녹아있는 원도심과 산복도로이다. 원도심은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강제적 근대화 의 일환으로 부산의 동구, 중구, 서구, 영도구 일대가 개항되면서 일본 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게 되어 커진 구도심을 말한다. 또한 산복도로는 최근 부산에서 뜨고 있는 여행지로 부산의 원도심 재생 계획에 따라 주목받고 있는 곳이며, 동구의 이바구길을 포함해 한국 근현대사의 살 아 있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곳이다. 부산을 보고 싶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계속 투어를 진행할 것이라는 사명감으로 오늘도 부 산역을 지키는 손민수 씨를 만났다.


산복도로에서 진짜 부산을 만나다


“지금 서동은 미로미로 골목이나 미로시장 같은 걸로 관심을 받고있는데, 자세히 보면 정말 집과 집 사이 틈이 한 뼘도 안 돼요. 사람이 지나갈 수도 없죠. 아예 붙은 집도 있고요. 그야말로 미로 같은 골목들 인데, 거기를 뛰어다니고 놀며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하지만 어린 시 절을 떠올려 보면 불행했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즐겁게 뛰놀던 기억이 가장 커요.”
민수 씨는 성인이 된 후 우연찮은 계기로 산복도로에 이사를 오게 되었고, 어머니로부터 당신 역시 산복도로에서 살다가 서동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 산 복도로에 대해, 더 나아가 진정한 부산을 알리는 부산 전문 해설사가 되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그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점은 
우연히 이사를 하게 된 산복도로 그의 옆집에 그가 여행사에서 일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동갑내기 친구인 정봉규 씨가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 다. 봉규 씨는 어린 시절부터 산복도로에서 살아온 그곳의 토박이이기 도 했다. 그렇게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그와 봉규 씨는 현재 함께 부산여행특공대를 운영하고 있다.


“그때부터 둘이서 매일 산복도로를 함께 돌아다녔어요. 그 친구는 산복도로에서 평생을 살아왔거든요. 돌아다니면서 얘기도 많이 하고, 서서히 산복도로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죠. 어느 날 천마산로 전망대에 갔다가 서로 얘기했어요. ‘우리가 한번 해보자. 해야 되지 않 겠나.’라고요. 그때만 해도 다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 일을 하면서 조금씩 사업 준비를 했죠. 그렇게 1년 좀 넘게 준비를 하고, 회 사에다 그만두겠다고 통보를 한 뒤 이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는 봉규 씨와 함께 산복도로를 돌아다니면서 이곳의 풍경이 진짜 부산이라고 생각했다. 산복도로에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에 의해 도심이 형성된 이후에 해방이 되고 나서 100만 동포가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그중에 8만 명이 부산에 정착을 했고, 6.25 전쟁으로 인한 피난 시절에 100만 명이 또 부산에 들어왔 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일자리가 있었던 부산역과 부산항, 국제시장 주변에 모였다. 그래서 이곳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렇게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 고 나니까 빈집들이 생겼어요. 그 빈집들은 50년대 말과 60년대에 부 산에 경공업이 발달하면서 시골에서 부산으로 돈 벌겠다고 온 사람들이 그나마 싸고 집을 구하기 쉬운 이쪽 산복도로 쪽에 터를 잡게 되면 서 채워진 것이죠. 그러면서 사상공단, 학장공단이 발달하고, 당시 유 일한 통로였던 서면이 발달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본이 동천공단으 로 갔다가 사상으로, 서울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의 표현에 의하면 부산은 숲과 도심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며, 산복 도로는 그 숲과 도심의 중간에 위치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렇게 부산여 행특공대 게릴라버스투어는 시작되었다.


가족사는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다.


민수 씨의 부산여행특공대는 2014년 7월 16일부터 8월 31일까지 시범 투어를 진행했다. 45일 동안 760명의 관광객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 고, 그 후 시범 투어 기간 동안 발생했던 문제점 등을 보완하고 지속적 인 운영을 해온 결과 지금까지 550여 회의 운행을 통해 3,900명이 여행 했을 정도로 그의 게릴라버스투어는 유명한 산복도로 시티투어 프로그 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산복도로 시티투어의 특징은, 투어를 경 험한 고객들은 모두 단골 고객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구수한 사투리 입담을 통해 숨겨진 부산의 명소를 소개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부산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특히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1940년대부터 70년대 까지 유행했던, 부산을 노래한 가요들을 들으면서 흥겹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이 투어의 특징이었다.
“제가 투어를 돌아보니, 참여하는 분들 중에 가장 이상적인 팀이 삼대( 三 代 )가 같이 오는 팀이에요. 삼대가 함께 오니 여행을 통해 세대 간에 몰랐던 서로의 이야기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제 가 기본적으로 얘기하는 건 부산의 근현대사거든요. 어르신들은 가장 가까운 기억이 근현대의 기억이에요. 자신의 기억과 맞닿아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투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떠올린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 내게 되고, 그 이야기가 자연스레 밑으로 전달될 수 있는, 이른바 기억 의 소통이 가능한 거죠.”
민수 씨는 평소에도 일상 속에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 노 력하고 있었다. 그는 늘 어르신들을 만나면 “이 동네 어땠어요?”라고 물으면서 채록을 했다. 부산여행특공대를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이 일을 하기 전의 그에게 여행은 그저 여행일 뿐이었지만, 산복도로를 돌다 보니 그에게 어느 순간 마을이 보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이 그저 가난한 마을이 아니라, 힘든 삶 속에 서도 오로지 희망으로 자식들을 길러 온 사람들의 역사와 온기가 느껴 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사람’과 사람들이 가진 ‘희망’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도 제가 계속 이곳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희망으로 살아온 진짜 우리 부산 사람들의 가치가 이곳 산복도로에 있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에요. 이곳을 그냥 가난한 동네로 볼 게 아니라, 부산 사람 들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봐 달라, 그런 얘기죠.”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미래는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민수 씨가 여행업계에 발을 디딘 것은 대학 졸업 이후, 부산과 일본 후쿠오카를 왕복하는 <코비>라는 여객선 회사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는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여행과 여행업에 어느 정도의 지식과 관심 을 갖게 되었다. 퇴사 후, 그곳에서 알게 된 팀장님과 <제이투어마스 터>라는 일본 자유여행 전문 여행사를 차리기도 했지만 실패했고, 이 후 10년 정도를 일본여행가이드로 일하기도 했다. 10여 년 동안의 가 이드 생활을 통해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통솔하는 것을 훈련해 올 수 있었기에 지금의 투어를 진행하는 데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지금 그가 가장 크게 겪는 어려움은 운영 부분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한 명의 고객만 있어도 출발하는 식의 운영으로는  돈이  안 돼요. 저흰 이 일을 해서 크게 돈을 벌지는 못하고 있거든요.  사실 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좋아서 시작은 했는데 사 실 지금까지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부산여행특공대>의 투어 프 로그램이 2015 가을관광주간 부산 대표 프로그램으로 선정되면서, 사 업 시작한 지 1년 만에 부산시나 외부 지자체에서 인정을 받고 성과를 이루기도 했어요.”
소셜벤처나 스타트업이 아닌 단순 개인 창업자로 시작한 사업이기에 그는 일단 1년 정도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해보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그 어떤 외부 지원도 없이 사업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자생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다행히 올해 는 지자체와의 연계 사업을 통해 앞으로 이 사업을 지속가능하게 만들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


“한 명이나 서너 명 출발하면 무조건 적자예요. 인건비가 들어가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해올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고객이라도 출발하겠다는 철학을 갖고 있는 건, 그 한 명이 나중에 천 군만마가 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열 명이 탔을 때의 한 명보다는 한 명 탔을 때의 한 명이 받는 감동이 열 배가 넘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부산 전문가를 더 많이 키우고 싶어요.


“제가 사람이 보인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제 교육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해 보려고 해요. 그리고 향후에 하고자 하는 일은 교육과 기부 활동에 초점을 맞출 거예요. 거창한 기부는 아니고 이전에 방송 출연한 출연료로 경로당에 화단을 만들어 드린 것 같이, 작더라도 마음이 있는 그런 일들을 하려고 해요. 더 큰 바람이 있다면, 부산을 제대로 해설하 고 설명할 수 있는 가이드들을 더 양성하고 싶어요. 더 많은 조교를 키워내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지금 둘이서 다 하려니 힘들어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민수 씨는 사업가가 아니라 사회활동가가 아니냐는 소리도 종종 듣 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 중 에는 ‘부산 시민을 위한 0원 투어’라는 여행 프로그램도 있었다. 최소한 의 운영 수익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품인 것은 맞지만, 그가 가장 중요 하게 보는 것은 그 속에 녹아있는 이야기였다. 투어 과정에서 이용객 개인이 가져가는 교훈이나 배움이 그들에게는 수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부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이 투어 상품을 이용하는 것 이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소비  활동이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은 여행업을 하고 있지만 저는 앞으로 부산에 대한 역사나 이 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전문 인력을 더 양성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어 른들의 기억은 자꾸만 사라져가고, 그분들은 곧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근현대와 맞닿아 있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채록 작 업들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지만, 글로 남아있는 이야기보다는 실제 로 살아있는 이야기를 귀로 전해 듣고 제가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줄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저는 우리 근현대사가 사라지기 전에, 보아야 할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게 제 꿈이에요.


“제 꿈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거예요. 제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에요. 직업이 꿈을 이루는 도구라는 말 은, 그 직업 자체가 꿈이 될 수도 있고, 그 직업을 통해서 다른  꿈을 이룰 수도 있다는 거죠. 그리고 스스로 즐거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해요. 즐겁지 않으면  결국  끝까지  못할  거라  생각하거든요.” 민수 씨는 지금 부산게릴라투어를 통해 자신을 거쳐 간 사람들이 행 복해하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행복해지게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어느 정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금 더 현실적인 꿈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삶의 방식들이 다른 사 람들의 시선에 어떻게 보이더라도, 그게 누가 봐도 가치 있고 올바른 삶의 방식이라면, 내 딸, 아들이 나를 보고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화두는 거래( 去 來 )라고 한다. 거래라는 낱말의 한자를  살펴보 면, ‘갈 거( 去 )’ 자에 ‘올 래( 來 )’ 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이 단어를 ‘나 자신이 먼저 줘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 나는 사람들에게 돈과 같은 보이는 물질이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 같 은 마음을 먼저 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점차 긍정의 에 너지가 쌓여 행복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사업적으로도 큰 도움 이 되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청소년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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